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좌의 난 (문단 편집) === [[반역향]]이 된 영남 === 영남 지방은 반란을 일으킨 삼남 지방 중에서도 가장 진압하기 어려웠던 탓에, [[흥선대원군]]의 복권 이전까지 [[세도정치]] 시기 내내 반역향(反逆鄕) 이미지가 붙었다. 봉기 자체는 삼남 지방 모두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삼남 지방 모두가 당시 조정에 대해 달갑지 않은 인식이었다는 점을 나타내지만, 맥없이 깨진 타 지방들에 비해 영남의 항전은 거셌으며, 남인의 거점인 영남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런데 이미 [[정여립의 난]]([[선조(조선)|선조]]) 때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찍히고 그 위쪽은 당시까지는 인구를 채우는 작업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인좌가 기반으로 삼은 [[충청도]] 지방도 반역향으로 판단할 수도 있지만, 충청(호서)지역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 살던 곳으로 노론의 본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미꾸라지 몇 마리 때문에 반역향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충청지방은 영호남과 함께 삼남으로 묶이기도 했지만, 충남은 경기지방과 함께 기호지방(경기+호서)으로 묶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즉, 준수도권으로 볼 수 있는 것. [[논산]](연산)의 [[광산 김씨]], 논산 노성(니산)의 [[파평 윤씨]], 회덕의 [[은진 송씨]]를 일컬어 호서 3대족 이라 했다. 특히 [[광산 김씨]]와 [[은진 송씨]]는 우리나라 [[양반|6대 국반(國班)]]으로 불리는 최고의 명문들이었다. 왜냐면 광산 김씨는 [[문묘]]종사 대현과 종묘배향공신을 동시에 지낸 인물을 배출한 가문으로 [[김장생]], [[김집]] 부자가 있는 유력가문이었고(김집의 제자가 [[송시열]]), 회덕의 은진 송씨는 노론 거두 [[송시열]], [[송준길]], 니산의 파평 윤씨는 [[송시열]]과 [[회니시비]]를 다툰 소론 [[윤증]] 등을 배출한 서인 명문가였다. 이처럼 호서지방은 전통적으로 서인 유력가문의 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그 이전에는 훈구파 가문의 세도 강했다. 청주 한씨 가문이 대표적이며, [[계유정난]]을 일으킨 [[한명회]]도 출신지는 한성부이지만, 본적은 [[충청도]]다.] 여담으로 [[사도세자]]는 이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광해군]]의 지지기반인 [[북인]]은 경상우도에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고, [[숙종(조선)|숙종]] 대에 [[장희빈]]을 밀다가 몰락한 [[남인]]은 경상좌도를 기반으로 하였던 탓에, 이인좌의 난 이전에 17세기를 거치면서 경상좌우도가 이미 중앙정치에서 밀려나 소외감을 느끼던 차에 영남 민심에 불을 지핀 게 바로 장희빈의 아들 [[경종(조선)|경종]] 독살설이고, 이런 민심을 이용한 이가 정희량이다. 호서가 노론의 근거지여서 우대를 받은 것도 상기한 것과 같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남 역시 [[안향]], [[정몽주]],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이황]] 등의 거유를 배출한 곳이다. [[유교]]를 국시로 삼는 조선이 저러한 성현들이 나고 활동했으며 그 후손들이 기거하는 고장을 반역향으로 홀대할 수는 없다. 당장 [[영조]] 때만 해도 퇴계 이황의 8대손 이세택이 영조 29년(1753) 문과에 급제한 후, 영조 39년(1763) 대사간에 임명된 사례가 있다. 이를 통해 이인좌의 난 이 후에도 영남 명문가는 여전히 우대 받았으며,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영남 상도는 상대적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영조실록]]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킨 후에도 진짜 반란의 수괴는 정희량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희량이 조부의 묘 이장을 핑계로 장정들을 모으고, 여러 시장들을 돌며 포목을 모아 반란군의 깃발과 군복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전에 정희량이 이미 치밀하게 계획했다고 봤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으로 불리우며 정작 이인좌는 [[충청북도]] [[청주시|청주]] 송면 출신으로 실제 그가 난을 처음 일으킨 지역도 청주이지만 이인좌 자신은 남인 강경파 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으므로 이래저래 남인 지역인 영남이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 영조 4년(1728) 평영남비를 정조의 명으로 감영이 있던 대구에 세웠다.[* 이 평영남비는 1919년 3월 30일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이라는 책에 수록되었는데, 원문과 해석을 보려면 다음 링크 참조 [[http://cafe.daum.net/jangdalsoo/hfWU/324?q=%ED%8F%89%EC%98%81%EB%82%A8%EB%B9%84|링크]]]이후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1910년 [[경술국치]] 직후에 철거되었다.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주된 내용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 황선의 충절을 기리는 것이다. 황선은 당시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고 실록에서도 '아니 어떻게 이런 인물이 알려지지 않았던가'라는 평가까지 내릴 정도였다. 직접 관군을 지휘하지 않고 [[대구광역시|대구]] 감영에서 마치 장기두듯 각지의 관군을 배치하여 영남군의 길목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지휘했는데 이러한 작전은 대성공을 거둬 중앙군의 지원 없이 경상도 관군 스스로의 힘으로 영남군을 격파하였다. 안타깝게도 난이 평정된 직후 감영에서 밥을 먹다가 독살당했는데,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이 반역의 고장으로 인식되어 한동안 과거응시가 막혀버렸단 것은 상술한 사례에서 보듯이 오해이다. 그리고 당대 집권층이 영남을 반역향의 이미지로 보았다는 것도 후술하는 사례를 볼 때 오해에 가깝다. [[승정원일기]] 801권 영조 11년(1735) 5월 26일 기사를 참조하자. 영조가 영남과 호남을 비교하며, "영남은 '문학'으로 교화하고 호남은 '좌도'로써 다스려야 하느냐?"고 김취로에게 물었다. 이에 이유가 말하길, "호남은 정여립 이후, 좌도[* 신앙, 주술(呪術) 그런 의미]를 숭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송진명은 "호남은 영남과 달리 산천과 풍토가 모두 이단을 숭상하는 형세"라고 답했다. 결국 이인좌의 난 이후에도 여전히 영남은 추로지향으로서 유교적 교화가 가능한 고장이란 인식을 당대 지배층이 공유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반역향 이미지 운운은 넌센스에 가깝다. 다만 그렇다고 영남 지역에 아무런 불이익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영조실록 43권 영조 13년(1737년) 3월 3일 신묘 4번째기사를 보면 경상도 감사 민응수가 도내의 이수연·조세붕·정희운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영남은 사부(士夫)의 기북(冀北)인데, 오로지 우도(右道)는 근래에 와서 풍습이 더욱 변천해진데다가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나왔기 때문에 추로(鄒魯)의 고장을 도리어 촉인(蜀人)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특별히 진작(振作)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자포 자기하여 글을 읽는 종자(種子)들이 영원히 끊기게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언급했다. 여기서 말한 기북(冀北)은 중국 기주(冀州)의 북방(北方)으로 준마(駿馬)가 많이 나는 곳인데 그처럼 인재가 많은 고장임을 일컫는 뜻으로 썼으며, 추로는 추로지향의 뜻으로 공자와 맹자의 고향을 뜻한다. 즉 그만큼 학식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도리어 촉인(蜀人)으로 대한다는 것은 당(唐)나라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亂) 이후 반역(叛逆)하여 복종하지 않았던 유벽(柳闢)이 통솔했던 촉(蜀) 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인좌의 난 이후로 영남 지역을 조정에서 반역을 저질렀던 지역이라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1303003_004|#]] 사실 좀 더 일찍 해결될 수도 있었다. [[영조]] 14년(1738)에 노론은 [[안동]]에 [[김상헌(조선)|김상헌]] 사원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영조 대의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는 척화 주전론을 외친 김상헌을 필두로 이후의 4대손 안에 부자(父子) [[영의정]], 형제 영의정 김수항, [[김창집]], 김수흥 등을 배출해낸 이력이 있는 노론 최대의 명문 집안이었다. 김상헌의 출신지과 은퇴지는 안동 소산이라 명분은 충분했고, [[경상도]] 관찰사 유척기(兪拓基), [[안동]]부사 어유룡(魚有龍), 안택준(安宅駿), 김창적(金昌迪) 등이 [[안동]]의 강씨‧신씨‧안씨 문중 등의 영남의 [[노론]] 세력과 손잡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인 영남 [[남인]]들은 결사 반대에 나서 [[안동]]에 들어설 서원을 습격해 부숴버린다. 안동에 거물급 [[노론]] 서원이 들어설 경우, 안동의 향권은 물론이고 남인들의 세력 근거지가 노론의 세력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익하(鄭益河) 감사는 귀정록(歸正錄)을 만들어 안동 유림이 노론으로 돌아설 것을 종용하고, 이어서 조영복(趙榮福) 감사도 갖은 방법으로 설득에 나섰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앙의 노론당에 보낸 편지는 묘하다. "그물을 [[낙동강]]에 던졌더니 종일 소득이 [[미꾸라지]] 몇 마리 뿐이요. 천김(川金)은 쟁쟁[* 시끄럽고 기가 세며 지역민심이 두텁다는 의미. 즉 '임금에게 쓴소리 잘한다.' [[의성 김씨]] 집안에 내려오는 선조의 가르침 중 '3년 동안 [[금부도사]]가 잡으러 오지 않으면 사대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임금에게 쓴소리, 즉 직언을 서슴치 말고 하라는 의미이다.]하고 하류(河柳)는 청청[* 고고하며, 과묵하게 자신이 할일을 묵묵히 해나간다는 의미로, 벼슬 자리 따위에 연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하다." 여기서 천김은 천전(내앞) 김씨를 이름이요 하류는 하회 유씨를 가리키는데 노론은 미꾸라지에 비유하며 한탄한 것이다.[* 천전 김씨는 학봉 [[김성일(조선)|김성일]], 하회 유씨는 서애 [[류성룡]]을 뜻하는데, 이 두 사람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그들의 후손들은 영남 남인의 핵심 명문 중 하나이다.] 영남 유림들이 백기를 들고 노론으로 투항하였다면 중앙 정계로의 길은 열렸을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미 18세기 부터 양반지배층이 경화사족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조선]]은 학풍과 가문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 변절적 선택은 쉽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했다 쳐도 얼마나 영광을 얻었을지는 의문인게, 이미 [[숙종(조선)|숙종]] 때부터 수도권 출신이 중앙정계를 장악했기에 그런 선택을 해봐야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조상 이름값도 못 한다.'는 비난에 시달릴 수도 있었다.] 물론 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희망사항이고,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다. 영조 13년(1737), 병조판서 민응수가 좌의정 김재로에게 "영남의 풍속이 벌써 한층 변하였습니다. 옛날에는 모두 남인이었는데, 지금은 그중 갈리어 나간 자들이 있습니다"라며 건의하고, 김재로는 조정에서 "영남인에 대한 대우를 다른 도와 다르게 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라며 영남 차별에 문제 제기를 하였으나 워낙 영조 치세에서 영남 지역에 대한 불신이 깊었는데다 영조의 재위 기간이 무려 52년이나 되었다.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한 후에야 영남 지역 인물들을 재등용하려는 기색이 나타났다. 노론 세력이 너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는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들인 [[이언적]]과 [[이황]]의 후손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한 재위 16년(1792) [[이언적]]의 [[옥산서원]]과 [[이황]]의 [[도산서원]]에 직접 제문을 지어보내 제사드리게 했으며, 도산서원에서는 도산별과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조선 500년을 통틀어, 전란이 아닌 시기에 '''[[한양]]이 아닌 지방에서 치뤄진 유일한 대과(大科) 시험'''이었다. [[경상도]] 유생 7,200명이 입장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답안지 3천 장이 제출되어 정조가 채점했는데, 강세백(姜世白)과 김희락(金熙洛)을 1, 2등으로 급제시켰다. 정조는 재위 후반기인 1792년에 1차 영남만인소를 통해 영남사림의 절대적인 정치적 지지를 확인하고, 정조 22년(1798)에는 왕명을 내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과, [[채제공]]의 양아들인 채홍원에게 영남인물고[* 총 17권. 조선 초기부터 [[경상도]]의 각 고읍 별 541명의 언행과 사적을 담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대출해가는 바람에 소실될 뻔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2011년에야 겨우 반환되었다.]라는 책을 편찬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정약용]]이 지은 책의 서문이 남아 있다. ||영남(嶺南)은 옛 [[신라]]국(新羅國)이다. 장백산맥(長白山脈)이 [[오대산]](五臺山)을 거쳐서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신라의 진산(鎭山)이 되고, 서쪽으로는 [[소백산]](小白山), 주흘산(主屹山)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되어 그치면서 신라의 병폐(屛蔽)[* 병풍처럼 감싸서 막음.]가 되었다. 황수(潢水)가 태백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그것이 또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모든 역내(域內)의 물이 바퀴살통처럼 모이고 힘줄처럼 모여서 하나로 합친다. 이 때문에 그 산천(山川)의 풍기(風氣)가 기타 다른 도(道)와는 전혀 다르고 그 인물은 영걸(英傑)하고 특출(特出)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일을 처리할 때는 튼튼하게 하였고 곱고 화려함은 좋아하지 않았다. 국가에 중대한 의논이 있을 적마다 온 나라가 그들의 의견에 이의가 없이 하나로 귀착되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일이 없다. 회재(晦齋, 이언적), 퇴계(退溪, [[이황]]) 등 여러 선생이 나신 이후로 선비들이 모두 예의(禮義)를 숭상하였으므로 성질이 못된 자가 있기는 하여도 공손하게 예모(禮貌)를 차리는 모습은 모두 학자의 기풍이 있었다. 주상 즉위 22년(1798)에 명하여 영남(嶺南)의 모든 이름난 사람의 언행(言行)과 사적을 가져다가 뽑아 모아 책을 만들게 하였는데, 채문숙(蔡文肅, [[채제공]])이 총재(總裁)가 되고 중씨(仲氏,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와 한혜보(韓徯甫, 한치응) 등이 이 일을 관장하였다. 그 이듬해에 내가 [[황해도]] [[곡산군|곡산]](谷山)에서 돌아오니(곡산부사를 마치고), 중씨가 그 초고(草稿)를 내어놓고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불과 수백 년 동안에 한 지방의 어진 이가 이처럼 많으며, 그 행실이 뛰어나고 덕의(德義)가 높은 사람으로 믿을 만하고 사적이 뚜렷한 자가 이처럼 혁혁하단 말인가. 그대는 그러한 까닭을 아는가. 가르침에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대(三代, 즉 夏殷周) 이후로 학교의 제도가 허물어지고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백성은 모두 저대로 나서 저대로 자랐다. 지혜로운 자는 혹 스스로 깨달아서 그 혈기(血氣)의 병통을 바로잡기도 하였으나, 어리석은 자는 자포자기하여 고치지 못하고 세상을 마치었으니, 이 점이 특출난 인물이 성긴 까닭이다. 영남은 그렇지 않아서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을 가숙(家塾)으로 알고 스승과 벗을 친척으로 여겨 떼를 지어 놀고 무리지어 익힘으로써 보고 느끼게 되었으니, 재질(材質)이 참으로 좋다면 어찌 이와같이 성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은 가르침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서문(序文)으로 삼는다."|| 그동안 지역을 겨냥해 인물들의 충의와 절의를 기리는 책들은 왕명으로 간혹 간행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특정지역의 인물사전을 편찬하라고 한 것은 집권층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먼 훗날 당파성이 약해진 고종 7년(1870)에 [[흥선대원군]]과 [[고종황제|고종]]의 [[남인]] 등용에 반대하는 [[노론]] 인사들이 올린 상소문과 1930년 [[윤치호]]의 기록을 살펴봐도 정조의 이런 행보가 당사자들에게 주었을 충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조는 치세말기로 갈수록 영남 지역에 대한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정조 23년(1799)에 영남인물고가 완성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함으로써 영남 지역의 중앙정계로의 재진출은 다시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미루어졌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경북 상주 출신 류후조가 좌의정으로 발탁되니 실로 서애 류성룡 이후 수백년만에 영남 현지에서 정승이 나왔다. 류후조는 류성룡의 8대손이기도 하다. (신) 안동 김씨가 흥선대원군 전까지 60년간 세도정치로 권력을 잡고 있었음에도 영남 지역이 혜택은커녕 불이익만 받다가 오히려 흥선대원군이 (신)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서야 드디어 영남 지역이 서광을 보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노론 음모론]] 신봉자들이 운운하는 "영남 노론(…)이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현대 [[대한민국]]까지 권력을 잡고 있다"는 소리가 헛소리라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노론 음모론이 퍼진 이유는 영조와 정조시대 영의정만 보더라도 심수현(경북 청송 심씨), 정호(경북 연일정씨), 이광좌(경북 경주 이씨), 김흥경(경북 경주 김씨), 지종성(경북 경주 이씨), 유척기(경북 포항 기계 유씨), 서지수(대구 서씨), 서명선(대구 서씨), 정존겸(동래 정씨)과 같이 경상도에 뿌리를 둔 집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수가 영조와 정조 집권기 영의정의 절반(중복 제외) 가까이 되는데, 아직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 되기도 전 이었다. 정조시대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훗날 영의정)도 청송 심씨 가문이었다.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는 대구 서씨였고, 영조가 다음에 들였던 왕비인 정순왕후도 경주 김씨였다. 정조는 아들의 왕비로는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 김씨(신 안동김씨)를 선택하였다. 이처럼 영조와 정조시대 영의정과 왕비가문은 경상도를 뿌리로 모시며, 한양 근방으로 이주한 자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가문의 뿌리와 족보가 중요했으며, 다른 명문가들(전주 이씨, 안동 권씨, 연안 이씨, 광산 김씨)처럼 이들에게도 본향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8세기부터 지방과 한양의 경제, 사회, 문화적 격차가 심해지고, 양반 집권층이 경화사족화 되기 시작하면서, 한양 근방에 거주하던 경상도계 영남 가문들은 굳이 정반대 학풍(남인)이 휩쓸고 있는 영남지방 사림들을 적극으로 등용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